크리스 패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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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리스 패튼(1944년 출생)은 잉글랜드 출신의 정치인으로,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홍콩 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보수당에서 활동하며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1992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 홍콩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홍콩 총독 재임 기간 동안 민주화 개혁을 추진하며 중국과의 갈등을 겪었고, 홍콩 반환 이후에는 북아일랜드 경찰 개혁, 유럽 연합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또한,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2024년까지 21년간 지냈으며, BBC 트러스트 의장도 역임했다. 패튼은 홍콩 및 중국 관련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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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패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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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접두사 | 각하 |
이름 | 반즈의 패튼 남작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 |
원래 이름 |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 |
출생일 | 1944년 5월 12일 |
출생지 | 랭커셔주 클리블리스 잉글랜드 |
정당 | 보수당 |
배우자 | 라벤더 손턴 (1971년 9월 11일 결혼) |
자녀 | 3명 (앨리스 패튼 포함) |
교육 | 이링 세인트 베네딕트 학교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올 칼리지 (문학 학사) |
수상 | 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 (1998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사령관 (2016년) 가터 훈장 (2023년) |
중국어 이름 | (팽정강) |
공직 | |
부총장 | 콜린 루카스 경 존 후드 경 앤드루 D. 해밀턴 루이스 리처드슨 아이린 트레이시 |
임기 시작 | 2003년 9월 20일 |
임기 종료 | 2024년 7월 31일 |
전임 | 로이 젠킨스 |
후임 | 헤이그 남작 |
위원장 | 로마노 프로디 조제 마누엘 바호주 |
지명자 | 토니 블레어 |
임기 시작 | 1999년 9월 16일 |
임기 종료 | 2004년 11월 22일 |
전임 | 레온 브리탄 |
후임 | 베니타 페레로발트너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정무사장 | 데이비드 포드 경 앤슨 찬 |
임기 시작 | 1992년 7월 9일 |
임기 종료 | 1997년 6월 30일 |
전임 | 데이비드 윌슨 |
후임 | 직위 폐지 둥젠화 (홍콩 행정장관) |
대표 | 존 메이저 |
임기 시작 | 1990년 11월 28일 |
임기 종료 | 1992년 5월 11일 |
전임 | 케네스 베이커 |
후임 | 노먼 파울러 |
각료 직책 | |
총리 | 존 메이저 |
임기 시작 | 1990년 11월 28일 |
임기 종료 | 1992년 4월 10일 |
전임 | 케네스 베이커 |
후임 | 윌리엄 월드그레이브 |
총리 | 마거릿 대처 |
임기 시작 | 1989년 7월 24일 |
임기 종료 | 1990년 11월 28일 |
전임 | 니컬러스 리들리 |
후임 | 마이클 헤셀틴 |
총리 | 마거릿 대처 |
임기 시작 | 1986년 9월 10일 |
임기 종료 | 1989년 7월 24일 |
전임 | 티모시 레이슨 |
후임 | 린다 챌커 |
의회 직책 | |
직위 | 세습 귀족 |
임기 시작 | 2005년 1월 11일 (평생 작위) |
임기 시작 | 1992년 7월 9일 |
임기 종료 | 1993년 2월 19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부의장 | 존 조지프 스웨인 경 |
전임 | 데이비드 윌슨 |
후임 | 존 조지프 스웨인 경 |
의회 | 영국 의회 |
선거구 | 바스 |
임기 시작 | 1979년 5월 3일 |
임기 종료 | 1992년 3월 16일 |
전임 | 에드워드 브라운 |
후임 | 돈 포스터 |
학술 직책 | |
부총장 | 제임스 라이트 크리스토퍼 에드워즈 크리스 브링크 |
임기 시작 | 1999년 10월 5일 |
임기 종료 | 2009년 10월 5일 |
전임 | 매튜 화이트 리들리 |
후임 | 리암 도널드슨 |
임기 시작 | 2011년 5월 1일 |
임기 종료 | 2014년 5월 6일 |
전임 | 마이클 라이언스 경 |
후임 | 다이앤 코일 (대행) 로나 페어헤드 |
기타 정보 | |
칭호 | 반즈 남작 |
일본 훈장 | 욱일대수장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크리스 패튼은 1944년 5월 12일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주 손턴-클리블리에서 태어났다.[4] 그의 어머니는 배데커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엑서터에서 피난 온 상태였다. 패튼은 아일랜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부모는 서런던에서 성공하지 못한 음악 출판업자였다. 그의 조상은 아일랜드 로스코먼주에서 잉글랜드로 이주해 왔다.[4] 아버지 프랭크는 대학을 중퇴하고[16] 재즈 드러머가 되었으며, 이후 대중음악 출판업에 종사했다.
패튼은 1974년 람베스 센트럴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79년 영국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1992년까지 바스 지역구에서 활동했다. 이후 북아일랜드 사무소 차관, 교육과학부 장관, 외무 연방부 해외 개발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영국 내각의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지역세(폴세) 도입을 추진했으나, 후에 이 정책이 마거릿 대처의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1990년에는 랭커스터 공작 영지 재상 겸 보수당 대표로서 1992년 총선 승리를 이끌었지만, 자신의 지역구에서는 낙선했다.
프랭크와 어머니 조안은 패튼을 그린포드에 있는 가톨릭 초등학교인 우리 성모 방문 초등학교에 보냈다. 이후 패튼은 서런던 이얼링에 있는 사립학교인 세인트 베네딕트 학교에 장학금을 받고[16][5] 진학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볼리올 칼리지에서 현대사 전공 전시 장학금을 받았다.[6][7]
1965년, 패튼은 2등급 명예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이후 윌리엄 쿨리지 패스파인더 상[8][9][10] 여행 장학금[11][12][13][14]을 받아 미국을 여행했다. 미국에서 그는 당시 뉴욕 시장이었던 공화당원 존 린지의 선거 운동에 참여하여, 경쟁자였던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의 텔레비전 출연에 대해 보고하는 업무를 맡았다.[15]
3. 정치 경력
1992년 7월, 패튼은 홍콩 총독 제안을 수락하여, 1997년 중국에 주권이 이양될 때까지 마지막 홍콩 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안정과 평온, 기쁨, 건강"을 의미하는 펑딩캉(彭定康)이라는 중국 이름을 받았다. 이전 총독들과 달리 외무부 출신 직업 외교관이 아닌 첫 전직 국회의원 출신 총독이었다.[18]
패튼의 재임 기간은 톈안먼 사건의 여파로 인해 여러 도전에 직면했지만, 그는 홍콩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며 대중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홍콩 주변을 산책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홍콩인들은 그에게 "뚱보 팡"(肥彭)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19] 그는 공식 석상에서 영국 궁정 예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20] 1992년 4월 패튼의 홍콩 지지율은 53%였으며, 재임 기간 동안 59.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21]
패튼의 가장 논란이 된 행동은 1994년 홍콩 선거 개혁이었다. 그는 기능별 선거구의 정의를 확대하여 사실상 모든 홍콩인이 홍콩 입법회 의원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홍콩 입법회는 1995년에 처음으로 전면적인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고, 식민 통치 마지막 몇 년 동안 기능과 조직을 확장했다.[22]
이러한 개혁은 홍콩의 친중국 정당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고, 일부 중국 언론과 정치인들은 패튼을 "동방의 창녀", "뱀", 루핑에 의해 "천 년 동안 정죄받을 죄인" 등으로 비난했다.[23] 패튼 총독 재임 기간에 선출된 입법회는 홍콩 반환 후 해산되고 임시 입법회로 대체되었다.
1997년 7월 1일 자정, 패튼은 "저는 이 정부의 행정을 포기했습니다. 여왕 폐하를 구원하소서. 패튼."이라는 전보를 보내 영국 통치의 종말을 알렸다.[24] 그는 홍콩 반환식 이후 찰스 왕세자와 함께 영국 왕립 요트 HMY ''브리타니아''를 타고 홍콩을 떠났다. 패튼은 이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되었으며,[25] 이후 홍콩 총독 재임 기간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26]
3. 1. 하원의원 (1979-1992)
패튼은 1974년 2월 총선에서 람베스 센트럴의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노동당 후보인 마커스 립튼에게 패했다. 이후 1979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992년 의원직을 잃을 때까지 바스 지역구에서 활동했다.[18]
1992년 총선에서 패튼이 재선에 성공했다면, 언론에서는 그가 외무장관으로 임명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존 메이저는 자서전에서 패튼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3. 2. 정부 요직 역임
패튼은 1983년 6월 북아일랜드 사무소의 의회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85년 9월 교육과학부의 국무 장관으로 승진했으며, 1986년 9월 외무 연방부에서 해외 개발 장관으로 임명되었다.[70]
1989년, 영국 내각의 환경부 장관으로 승진하여 인기가 없었던 지역세(폴세)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정책을 강력하게 옹호했지만, 2006년 저서 ''그리 외교관 같지는 않은''에서 마거릿 대처의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0년 환경 보호법을 도입하고 의회를 통과시켰다.[70]
1990년, 존 메이저는 패튼을 랭커스터 공작 영지 재상이자 보수당 대표로 임명하여 다가오는 총선에서 보수당의 재선 캠페인을 조직하는 책임을 맡겼다. 당 대표로서, 1992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를 이끌어낸 주요 설계자로 널리 여겨졌지만, 배스 지역구에서 자유민주당 후보 돈 포스터에게 패배했다.[17][71] 패튼의 패배는 폴세와 같은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졌다.[17]
4. 홍콩 총독 (1992-1997)
1993년 4월 이전 통화 문제 장관
1993년 4월 이전 통화 문제 장관